초등학교 사학년 때 였으니 열 한 살 어름이었을 것이다.
매년 어린이날을 기념하며 '사생대회' 라는 것을 덕수궁에서 열었는데 각 학급 당 한두 명씩 뽑혀서 대회에 참가 했다. 중고등부도 함께 했는지 덕수궁 안에서 교복 입은 언니들을 많이 본 것도 같다. 그림에는 별로 소질이 없던 내가 어쩌다 그 해 뽑혔다.
대회 참가자는 일주일 전 쯤 미리 발표 했기에 나는 일주일 내내 24색 크레용을 사달라고 어머니께 졸랐다. 24색 모나미 크레용은 뚜껑을 열 때부터 향기도 나고, 은은하고 연한 색도 많아 군침을 삼킬 만큼 눈부셨으나 값이 비싸서 보통 애들은 12색 크레용을 썼다. 그나마 빨강 노랑 파랑같이 많이 사용하는 색은 아주 작은 몽당으로 남아있고, 검은색, 군청색, 흰색만 겨우 손에 쥘 수 있을 정도였다.
대회날 아침, 나는 엉엉 울며 24색 크레용을 사 달라고 떼를 썼다.
어머니는 덕수궁 앞으로 크레용을 사갖고 갈 테니 먼저 학교에 가라고 하셨다. 학교에 갔더니 그날 대회에 참가하기로 뽑힌 아이들은 수업을 하지 않고, 도시락과 화판을 챙겨 인솔 선생님을 따라가라고 했다.
아현동에서 전차를 타고 남대문에서 내려 덕수궁까지 걸어갔는데 다른 학교 아이들도 많아서 모두 줄을 맞추어 입장 했다. 대회 진행요원 선생님들이 밑에 이름을 쓰는 쪽지가 붙은 도화지를 나누어 주었다. 나는 도화지를 받자마자 부리나케 문 앞에 앉아 새 크레용을 사 오실 어머니를 기다렸다.
아이들은 삼삼오오 흩어져 철쭉과 연산홍이 피어난 연못을 그리거나 궁궐의 날렵한 팔작지붕의 골기와를 꼼꼼하게 그리거나, 석조전을 은색으로 그리기 시작 했다. 나는 헌 크레용 곽 속에 몽당 크레용 몇 개와 잘 안 쓰게 되어 조금 길게 남은 검은색 흰색밖에 없어서 꽃도 하늘도 지붕도 그릴 수가 없었다. 그림에 별다른 소질이 없고, 아직 어렸기에 꽃은 분홍이어야 되고, 연못은 파란색이어야 하며 집은 밤색으로 그려야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한문 앞에 쪼그려 앉아 어머니가 오시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오후 2 시가 넘자 벌써 다 그린 아이들은 본부석에 제출하고 또래끼리 몰려다니거나 풀밭에서 네잎 클로바를 찾으며 재미있게 놀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가 오셨다가 나를 찾지 못할까봐 대한문 기둥에 기대 앉아 자리도 못 뜬 채 긴 봄날 하루해를 꼴깍 넘기며 기다렸다. 해가 기울자 대부분의 아이들은 돌아가고 이젤을 놓고 정교하게 그리는 진짜 미술가 같은 언니들만 몇몇 남았다.
누군가 내게 와서 빨리 내라고 재촉했다. 나는 대한문 기둥 밑 대리석 위에 도화지를 놓고 내가 갖고 있는 몽당크레용 조각을 모두 짓이겨 발랐다. 토막이 너무 작아 사실 손끝에 쥐어지지도 않아 손톱으로 짓뭉갤 수밖에 없었는데 남아있는 모든 색깔을 다 짓이기자 이상하게도 도화지는 검은 색이 되어 있었다. 오지 않은 어머니가 밉고 야속해서 뜨거운 눈물이 갖가지 크레용이 묻어 얼룩덜룩한 손등 위로 뚝뚝 떨어졌다.
검고 칙칙하면서도 두껍게 입혀진 도화지에 한 개 남은 흰색 크레용으로 대충 그려 나갔는데 놀랍게도 그건 희미하나마 여자의 형상이었다. 빽빽한 밑그림에 흰색 크레용은 덧칠이 잘 되지 않아 마구잡이로 그어대자 머리는 뒤로 묶고 눈을 왕방울만하고 입이 귀까지 쭉 찢어진 마귀할멈 같은 여자 형상이 하나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밑에 붙어있는 쪽지에 이렇게 썼다.
한 달 뒤, 내 그림이 입선하여 조회시간에 불려나가 자랑스럽게 상장과 부상을 받았다. 스프링이 달린 스케치북 한 권과 24색 모나미 크레용 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 기억을 더듬다 웃음이 쿡쿡 터져 나온다. 어째서 그 그림이 입선이 되었는지 도무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입선된 그림들은 따로 교무실에 전시해 놓았는데 어느 날 어머니가 오셨다. 나와 함께 교무실 벽에 붙은 시꺼먼 그림을 한참 보시더니 " 저게 이 에미냐? " 한마디만 하셨다.
나는 밉고 야속했던 사생대회 날의 기다림이 떠올라 삐죽 삐죽 울었는데 그 속에는 어머니의 형상을 너무도 예쁘지 않게(검게 뭉개진 바탕이어서) 그린 미안한 마음을 들키기 싫어서 였을 것이다.
지금도 내 기억속의 어머니는 기다리다 지치고 절망하는 여자다.
허리띠로 이마를 질끈 동여매고 방바닥을 주먹으로 쳐가며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평양 사는 당신 어머니를 부르며 넉장거리는 여자였다. 전쟁 후 가족과 이산되어 홀로 살아온 어머니의 한은 늘 악다구니와 울부짖음으로 표현 되었고 나는 그게 지긋지긋해서 공손하지 못한 딸로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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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이 자라 초등학교 일학년 때이다.
무슨 일 인가 있어 학교에 가서 회의도 하고 방과 후에 다른 어머니들과 교실로가 애들 상담도 하고 하는 그런 자리였다. 담임선생님이 나를 보더니 누구 엄마지요? 하면서 갑자기 생각난 듯이 교탁 위의 공책을 찾아 보여 주었다. 선생님은 깔깔 웃으시며 아이가 너무 천진하고 재미있어서 어머니께 보여드린다며 공책을 펼쳤다.
그것은 아이가 매일 숙제로 쓰는 그림일기 공책이었다. 위칸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공간이 넓고 아래 칸은 글씨를 쓸 수 있도록 네모 줄이 쳐져있다. 거기 딸애가 그린 그림이 색칠되어 있었다.
머리는 검정 크레용으로 동글동글 말아가며 그려서 꼬불꼬불한 파마머리가 부수수했고 동그란 얼굴은 온통 시뻘겋게 색칠되어 있었다. 오로지 빨간 크레용으로만 칠 했을 뿐 눈도 코도 입도 없었다.
아래 칸에 서툰 글씨가 삐뚤하게 쓰여 있다.
거기 모인 다른 엄마들도 다 들여다보고 까르르 웃어서 나도 덩달아 따라 웃었다. 하지만 얼굴이 빳빳해 지도록 창피해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그날 저녁 나는 그림일기를 그린 내 딸을 큰소리로 야단치고 등짝을 후려쳐서 기어이 울리고야 말았다.
에미 망신을 줘도 분수가 있지.
에미를 그렇게, 아이구 창피하게 술 먹었다고 광고내고 시뻘겋게 그려놓다니.
선생도 학부형들도 다 내 또래였는데 도대체 나를 뭘로 보겠어. 엉?
이성적으로 자식을 다루지 않았다고 내심 어머니께 반발하던 나는 훨씬 그악스럽고 위험하게 내 딸을 다뤘다. 역사적 상처로 받은 어머니의 한을 지긋지긋해 하던 내가, 내 맘대로 안 되던 세상일이나 내가 노력하지 않았던 못남을 나의 한으로 만들어 결국 어머니가 보여주었던 것 보다 더 비겁한 모습을 내 딸들에게 보여주게 된다.
' 엄마는 속상해서 술 마시는 거야, 그러니까 엄마처럼 되면 안 돼...'
그것을 절대적인 모성이라고 우겼다. 내가 그린 검은 크레용 따위로 마구 문질러 댄 엉터리 형이상학적인 어머니 그림이나 내 딸이 그렸던 술 먹어 씨뻘건 엄마 얼굴 그림들은 다 없어졌다.
그러나 나는 기억 한다.
내 딸들의 어머니가 내 어머니보다 못난 여자였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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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말년에 치매에 걸려 고생하시다 돌아가셨다. 장례를 치루고 와, 혼자 쓰시던 방에서 잡동사니를 치우는데 신문 광고지 전단 여러 장이 농속에서 나왔다.
뒷면 여백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 어제는 13일 수요일, 오늘은 목요일 14일, 내일은 15일 금요일. "
다른 종이에는 이렇게 또 쓰여 있었다.
" 오늘은 5일, 어제는 4일 , 내일은 6일 토요일. 큰딸 오는 날. "
수십 장의 종이 뒷면에 알 수 없는 말들이 암호처럼 써있었는데 사라져 가는 기억을 붙들어 보려고 안간힘 쓰시던 흔적이었다. 잊혀지는 기억의 조각을 잡으려고 몸부림치며 괴로워하다가 조금씩 이완되듯 망각의 늪으로 빠지셨던 것이다.
그 종이를 태워 버리려는 봉지에 담으며 가슴이 찢기듯 아파 오열했다. 어머니는 그 때 저승에 가기 전 레테의 강, 그 망각의 강을 건너고 계셨던 것이다. 이승에서 겪은 전쟁의 비극을 다 기억 하고 어떻게 버틸 수가 있겠는가. 하나씩 잊어버리는 건 재난이 아니라 축복임을 이제야 깨닫는다.
세 살배기 외손녀딸은 아무 펜이나 들고 다니며 방바닥이고 벽이고 침대 위나 문갑위에 동그라미를 삐뚤빼뚤 그린다. 손이 서툴러 약간씩 이그러진 동그라미 안에 점을 찍거나 줄을 몇 개 직직 그어대고 그게 엄마라고 했다.
나는 귀여워서 그런 낙서를 말리지 못한다. 백지를 한 장 주었더니 한 개를 그리고 엄마 엄마 하더니 그 옆에 또 한 개의 동그라미를 그려 그건 함무이 함무이라고 한다.
손녀를 안을 때 그 사랑스러운 무게. 두 팔 가득한 충만함. 삶은 달걀을 까놓은 것처럼 말랑하고 하얀 피부가 꽃잎같이 여리다. 아! 아! 귀여운 내 살붙이. 세 살배기가 그린 넓죽한 동그라미 안에 눈이 세모로 찢어진 모양새의 함무이가 나를 째려보는 듯하다.
이쁜 내 새끼에게 뽀뽀를 하고 냉장고에서 맛있는 까까를 꺼내 주려다 거기 붙여 놓은 메모쪽지를 보았다.
아토피성 피부로 태어난 손녀딸에게 절대 먹이면 안 될 음식을 내가 잊고 주게 될까봐 내 손으로 크게 써서 붙여 놓은 메모 쪽지다.
이제는 나도 더러 기억을 놓치는 적이 많다.
언젠가, 그러나 머지않아 나도 레테의 강을 건너게 될 것이다.
술 먹은 엄마를 시뻘겋게 그려서 망신을 주었다며 어린 딸의 등짝을 후려친 몹쓸 에미인 것을,
레테의 강을 건너가며 잊지 않고는, 어찌 울지 않고 다른 세상으로 갈 수 있을 것인가.